일요일 오후 3시를 기점으로 월요일이 성큼 다가온다.
직장인들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일요일 오후부터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음 한주를 대비한 에너지를 보전하기 위해 스케줄을 잡지 않는다.
공연이나 영화도 일요일 오후에는 잡지 않고, 주말에 놀러가더라도 가급적이면 오후 3시 전에는 도착해서 쉬려고 한다.
저녁약속도 물론 잡지 않고.
그러다보니 일요일 오후는 집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어제는 틀어져버린 약속 때문에 종일 집에 있으려니 답답해서
얼마전 선물받은 책을 들고 집근처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이상하게도 집에서 책을 보면 30분도 안되서 졸리고, 기어이 침대로 이동하게 된다. 재밌는 책도 대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자주 카페에 가는데, 여름에는 에어컨을 너무 빵빵하게 틀어놓는 탓에 추위를 많이 타는 나로써는 1시간을 버티기가 힘들다.
그런 내가 좋아하는 장소는 집근처 예술의 전당의 야외 테이블이다.
보통 야외분수와 카페가 있는 곳은 사람들도 붐비는데, 한예종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있는 국립국악원의 앞마당까지는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도 있을테고 딱히 구경거리 없이 잔디밭에 큰 파라솔이 있는 나무 테이블 10여개 정도가 있을 뿐이니, 보통 우면산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사람들이 잠시 쉬거나 나처럼 조용한 곳을 찾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아침과 저녁 무렵에는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서 책을 읽기 딱 적당하다.
근처 카페에서 음료를 사서 그곳에 갔더니 역시나 5시 부렵 햇빛은 한풀 꺾이고 적당히 바람이 불어왔다.
가지고간 책도 재밌어서 금방 빠져들어 읽고 있었는데, 7시쯤 되니 먹구름이 조금 몰려왔다.
가족, 친구들과 산책나왔던 사람들이 비가 올지 모르니 빨리 가자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비 예보 소식을 듣지 못했고
(보통 외출할 때 카카오미니에게 비가 오는지 날씨를 물어보는데, 종일 쨍한 파란 하늘이어서 스킵했다.)
책을 마저 읽고 싶던 마음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져도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10분 정도 지나니 갑자기 온통 세상이 회색빛으로 변하고,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집에 가면 샤워할꺼고 파라솔로 인해 책과 머리는 젖지 않고 있으니 계속 버텼는데,
급기야 바람이 세게 불면서 파라솔이 무색하게 책위로 빗방울이 떨어져서 급하게 건물 처마 밑으로 달려갔다.
바람이 워낙 세서 금세 옷이 젖었다.
나처럼 비를 피해 건물 앞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꽤 보였다.
(일요일은 국립국악원이 운영하지 않는지..아니면 그 시간에 공연이 없었는지 건물이 잠겨 있어서 내부는 들어갈 수 없었다)
비는 쉽게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포기하고 달려가는 사람과 근처 집에서 우산을 들고 찾아온 가족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어차피 우산을 가져다줄 사람도 없는데다, 도저히 그냥 맞을 정도의 비는 아니라 저절로 마음이 내려놓아졌는지 그냥 책이나 계속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책 위에 빗방울이 조금씩 날리기는 했지만 어차피 내책이니 그리 신경쓸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건물의 조명에 비추어 책을 읽었고, 1시간 30분쯤 지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비도 한풀 꺾여있었다.
빗줄기가 보슬비 정도로 바뀌어 이정도는 맞아도 되겠다 싶을 때 처마 밑을 떠났고, 다행히 조금 지나자 비는 완전히 멈추었다.
계획상으로는 한두시간 정도 책을 읽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3시간30분을 (그 중 1시간 30분은 소나기 속에서..) 보내고 집에 오니 9시가 되어갔다. 이렇게 일요일 오후를 의도치 않게 한권의 책을 완독을 하며 보냈다.
계획이 틀어졌음에도..평소의 나답지 않게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분석을 통해 도달한 나름의 결론은 아래와 같다.
0. 모든 일에는 징후가 있다.
분명히 나는 더 안전한 곳에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세번의 기회가 있었다.
쨍하던 햇빛이 사라지며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자리를 뜨며 비가 쏟아질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10여분 쯤 후 제법 굵어지기 시작했을 때.
그렇게 명확한 소나기의 징후가 있었음에도 나는 무모하리만큼 이를 무시하고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
먹구름은 끼었지만 비가 곧 내리지는 않을 것, 그리고 심지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도 곧 그칠꺼라고 생각했던 것
선택은 나의 몫이지만 일단 사실은 있는 그대로 인지해야 한다.
1. 유비무환
가벼운 접이우산 하나만 가지고 왔어도,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을 때 공연이 있는 예당 콘서트홀로 이동할 수 있었을 텐데 책이며 다이어리며 티슈며 바리바리 챙기면서도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이제는 동남아처럼 수시로 예고없이 비가 쏟아질 수 있으니 여름에는 우산이든 우비든 하나는 가지고 외출해야겠다
2. 모든 일에는 좋은점과 나쁜점이 공존한다.
비를 좀 맞기는 했지만 그덕에 몇달 미뤄왔던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재밌을 줄 알았으면 진작에 읽을걸 싶었다.
3. 겪어보면 생각만큼 힘들지 않다.
'천둥 번개 바람을 동반한 소나기가 내리는 상황에서 건물 처마밑에서 1시간30분을 비를 피해있었다'는 사실,
게디가 그게 일요일 저녁이라는 팩트만 보면 끔찍할 수 있다.
그런데 비를 맞는것, 처마밑에서 한시간 넘게 서서 비를 피하는 것이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누구나 휴대폰은 갖고 다니니 책이 없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걱정이 앞서서 잠을 못이룰 때가 있다. 그러나 많은 일 들이 막상 닥치면 그리 힘들거나 어렵지 않은 경우가 있다. 우리의 능력을 믿자
4. 이 또한 지나가리라
초반 무서운 기세로 비가 내릴 때는 쉽게 그치지 않겠다 싶기도 했지만 역시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며, 최고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음을 알아야 한다.
5. 짜증낸다고 안달한다고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마음이다.
딱히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평소의 나답지 않게 의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하필이면 오늘 날씨를 확인하지 않았는지, 일주일에 3~4일은 방에 넣고 다니는 우산을 무겁지도 않은데 왜 굳이 빼놓고 왔는지, 먹구름이 몰려오고 사람들이 비올거라고 얘기했을 때, 아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왜 좀 더 안전한 곳으로 피하지 않았는지...자책도 후회도 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라며 불운을 쓸데없이 부각하지도 않았고.
빨리 상황을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더니 편안하게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제의 에피소드로 인한 깨달음만 보면 마치 득도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오늘도 여전히 회사에서 욱하고 후회하고, 어젯밤 잠들지 못할 땐 오후 늦게 커피마신 걸 후회하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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