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말 오후 햇살이 쏟아지는 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집안에 살아있는 것이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물론 집안 어딘가에 모기나 이름모를 벌레가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내가 돌볼 필요가 있고,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생명체 말이다.
강아지는 외로움을 탄다고 해서, 고양이는 알러지가 문제가 되어 키울 생각을 전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데, 내가 누굴 돌보겠냐는 생각이 컸다.
그날 이후 어린왕자 속 장미를 키우는 여우처럼 나에게 특별한 생명체가 있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생겼고, 고민끝에 생각해 낸 것이 반려식물이다.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 꽃도 좋지만 셀 수 없이 다양한 초록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어떤 인공적인 색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초록
그리고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와 나무 냄새를 좋아한다.
어릴적 살던 집은 사방이 마당으로 둘러쌓인 작은 단독주택이어서 나무와 꽃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빠가 그네를 만들어줄 정도로 커다란 백목련 나무부터 대문앞에 들어서면 향기로 맞아준 라일락, 따먹는 재미가 쏠쏠했던 앵두나무와 감나무까지.
그릭 도라지꽃 매화, 철쭉, 국화..그 외 이름을 기억 못하는 여러 꽃들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시에는 부모님이 외출을 하시면 화초에 물을 주는게 우리들 몫이였기에 귀찮다고만 생각했는데, 내 몸 어딘가에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는지 유독 식물을 보면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식물을 기르겠다는 마음을 먹지 못했던건 내가 화초기르기에 소질이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 포인세티아 화분을 사면 한달을 못넘겼고, 종종 친구나 직장에서 선물받은 화분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물을 너무 많이 줘서 혹은 적게 줘서, 햇빛을 너무 받아서 혹은 부족해서…다양한 이유로 덩그러니 화분만을 남겨준채 안녕을 고했다.
나는 누군가를 돌보는데 영 젬뱅인건가 라는 자조섞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반려식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나답지 않게 행동이 빨라졌다. 화초가 죽을 떄 같이 버리지 않고 보관해둔 화분 2개가 떠올랐고,
당장 동네를 산책하며 봐두었던 꽃집으로 향했다.
꽃집 사장님하면 떠오르는 플로리스트의 전형적인 모습과 조금 다른 제법 씩씩해 보이는 사장님이 맞아주었다.
겨울이라 화초를 많이 두지 않았다며, 현재는 내 화분에 심을만한 적합한 식물이 없다고 했다.
화분을 놓고 가면 농장에 갈 때 적당한 걸 사다가 심어주겠다고 했다. 왠지 믿음이 갔다.
가게에 있는 몇몇 화분들을 둘러보며 마음에 드는 몇 개를 골랐다. 가능하면 그중에서 심어달라고.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게 없이 빈손으로 오는 길이었지만 기분이 좋아 발걸음이 경쾌했다.
첫발을 뗀 셈이니 그걸로 충분하다.
역시 사람은 좋아하는 할때보다 그걸 기다리는 시간에 더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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