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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세번째 '노르웨이의 숲'

오랜만에 다시 접한 하루키 초기작 '노르웨이의 숲'. 국내에서는 '상실의 시대' 란 제목으로도 출판되었었다.

언니 책장에서 상실의 시대를 보았었고, 대학 입학 후 도서관을 들락날락 거리던 시절, 하루키 소설 한권쯤은 읽어봐야지 싶어 처음 접했던 책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다시 접한 하루키 초기작 '노르웨이의 숲'. 국내에서는 '상실의 시대' 란 제목으로도 출판되었었다.

언니 책장에서 상실의 시대를 보았었고, 대학 입학 후 도서관을 들락날락 거리던 시절, 하루키 소설 한권쯤은 읽어봐야지 싶어 처음 접했던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 이 소설은 나에게 별로 감흥이 없었다.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없었고,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건지도 이해가 안됐었다.

당시 내가 좋아하던 작가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씨 이야기, 비둘기, 콘트라베이스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결이 많이 다르긴하다.

젊은이들의 사랑과 방황보다는 인간 내면의 탐구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아마 이전까지 해야하는걸 하기만 하던 생활에서 벗어나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가야되나에 대해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하던 때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하루키 소설과의 첫만남은 어려웠고, 이후 한동안 그의 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하루키의 에세이들 (특히, 여행집)을 읽고 그의 유머에 빠져들어, 한편으로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이 부러워 에세이들을 탐독했고, 이어서 단편집들을 그리고 장편소설로 넘어가면서 선택한 첫책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아마 길고 평범하지 않은 제목에 끌렸을지 모른다.

하드보일드라는 영어단어에 호기심이 생겼을 수도.

상실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초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이었는데, 책장을 열자마자 빠져들어 읽었다.

솔직히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한건 아닌것 같은데, 일각수가 사는 마을, 꿈을 읽는 사람, 그리고 꿈속으로 들어가는 설정이 생소했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된 탓에 이런일이 가능하냐란 의심할 새도 없이 그 상황에 몰입되어 버렸다.

이후 두어번 더 읽었고, 태엽감는 새, 해변의 카프카와 같은 유사한 스타일의 소설들을 읽어나가면서 소위 그의 덕후가 되었다.

그래서 신간이 나오면 궁금함에 팬심이 더해서 꼬박꼬박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리고 도시와 그 불확실한벽이 가장 최근에 읽은 그의 책인 것 같다. 최근엔 뜸해졌지만..누군가 나에게 하루키 작품 중 무엇을 가장 좋아하냐고 물으면 카테고리로는 에세이지만, 소설 중에서는 언제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였다.

그리고 영화 '인셉션'을 보는 내내 이 소설이 떠올라서 몹시 흥분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인셉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 책을 추천했었다.

서론이 매우 길어졌는데, 요는 노르웨이의 숲은 그닥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었을 때는 반가웠다. 이번에 읽게 된다면 세번째인데, '위대한 갯츠비'처럼 내가 세번의 시도 끝에 책의 진면목을 발견할지, 아니면 피천득의 인연처럼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하는 '아사코'가 될지 궁금했다.

시간이 없어서 휘리릭 훑어보기만 했는데, 그의 다른책에서 느꼈던 몰입은 없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 더 이해가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사람들과 토론을 하면서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짐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이 책의 메세지에 어느정도 공감하게 되었다.

지금 봐도 놀라운건 소설 한편에 무려 자살하는 사람이 3명이나 등장한다는 점. 도대체 1969년의 일본은 어땠길래 이렇게 젊은 청춘들이 허무를 느끼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했을까.

전후 급속한 경제발전 단계에서 여러 사회문제를 겪으면서 무력감을 느끼던 대학생들, 가치관의 혼란을 겪던 그들은 삶에 대해 의미를 찾기 위해 매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접했던 때는 그 시대적 배경과 차이가 있어서 그들에게 공감을 못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90년대 생들도 그 당시의 나와 비슷해보였다. 

그럼에도 방황하는 청춘들을 통해 하루키가 얘기하려 했던 건 공감한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래서 완전이란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걸 쫓을 때 불행해진다.

 

우리가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하거나 계획한다고 해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변수는 너무 많다. 특히나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외부요인들도.

그래서 불완전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불완전함에 대해서도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불완전함도 이해해야 한다.

또하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삶의 의미부여에 집착하면 안된다는 것.

리처드 도킨슨은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다음세대에 유전자기 위해 태어났다고 했다. 너무 극단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오히려 나는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 내가 모르는 의미가 있을거라고 찾으려고 한다거나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다가 그 무게에 압도당해 괴로운 삶을 살기 보다는 유전자 전달을 위한 도구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의미와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난건 수동적인 것이다, 결국 삶은 주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는 능동적이다. 나의 의지에 따라 충분히 의미있게, 즐겁게, 행복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이 의미있는게 아닐까.

오랜만에 다시 접한 하루키 초기작 '노르웨이의 숲'. 국내에서는 '상실의 시대' 란 제목으로도 출판되었었다.

언니 책장에서 상실의 시대를 보았었고, 대학 입학 후 도서관을 들락날락 거리던 시절, 하루키 소설 한권쯤은 읽어봐야지 싶어 처음 접했던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 이 소설은 나에게 별로 감흥이 없었다.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없었고,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건지도 이해가 안됐었다.

당시 내가 좋아하던 작가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씨 이야기, 비둘기, 콘트라베이스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결이 많이 다르긴하다.

젊은이들의 사랑과 방황보다는 인간 내면의 탐구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아마 이전까지 해야하는걸 하기만 하던 생활에서 벗어나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가야되나에 대해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하던 때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하루키 소설과의 첫만남은 어려웠고, 이후 한동안 그의 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하루키의 에세이들 (특히, 여행집)을 읽고 그의 유머에 빠져들어, 한편으로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이 부러워 에세이들을 탐독했고, 이어서 단편집들을 그리고 장편소설로 넘어가면서 선택한 첫책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아마 길고 평범하지 않은 제목에 끌렸을지 모른다.

하드보일드라는 영어단어에 호기심이 생겼을 수도.

상실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초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이었는데, 책장을 열자마자 빠져들어 읽었다.

솔직히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한건 아닌것 같은데, 일각수가 사는 마을, 꿈을 읽는 사람, 그리고 꿈속으로 들어가는 설정이 생소했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된 탓에 이런일이 가능하냐란 의심할 새도 없이 그 상황에 몰입되어 버렸다.

이후 두어번 더 읽었고, 태엽감는 새, 해변의 카프카와 같은 유사한 스타일의 소설들을 읽어나가면서 소위 그의 덕후가 되었다.

그래서 신간이 나오면 궁금함에 팬심이 더해서 꼬박꼬박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리고 도시와 그 불확실한벽이 가장 최근에 읽은 그의 책인 것 같다. 최근엔 뜸해졌지만..누군가 나에게 하루키 작품 중 무엇을 가장 좋아하냐고 물으면 카테고리로는 에세이지만, 소설 중에서는 언제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였다.

그리고 영화 '인셉션'을 보는 내내 이 소설이 떠올라서 몹시 흥분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인셉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 책을 추천했었다.

서론이 매우 길어졌는데, 요는 노르웨이의 숲은 그닥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었을 때는 반가웠다. 이번에 읽게 된다면 세번째인데, '위대한 갯츠비'처럼 내가 세번의 시도 끝에 책의 진면목을 발견할지, 아니면 피천득의 인연처럼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하는 '아사코'가 될지 궁금했다.

시간이 없어서 휘리릭 훑어보기만 했는데, 그의 다른책에서 느꼈던 몰입은 없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 더 이해가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사람들과 토론을 하면서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짐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이 책의 메세지에 어느정도 공감하게 되었다.

지금 봐도 놀라운건 소설 한편에 무려 자살하는 사람이 3명이나 등장한다는 점. 도대체 1969년의 일본은 어땠길래 이렇게 젊은 청춘들이 허무를 느끼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했을까.

전후 급속한 경제발전 단계에서 여러 사회문제를 겪으면서 무력감을 느끼던 대학생들, 가치관의 혼란을 겪던 그들은 삶에 대해 의미를 찾기 위해 매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접했던 때는 그 시대적 배경과 차이가 있어서 그들에게 공감을 못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90년대 생들도 그 당시의 나와 비슷해보였다. 

그럼에도 방황하는 청춘들을 통해 하루키가 얘기하려 했던 건 공감한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래서 완전이란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걸 쫓을 때 불행해진다.

 

우리가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하거나 계획한다고 해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변수는 너무 많다. 특히나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외부요인들도.

그래서 불완전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불완전함에 대해서도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불완전함도 이해해야 한다.

또하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삶의 의미부여에 집착하면 안된다는 것.

리처드 도킨슨은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다음세대에 유전자기 위해 태어났다고 했다. 너무 극단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오히려 나는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 내가 모르는 의미가 있을거라고 찾으려고 한다거나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다가 그 무게에 압도당해 괴로운 삶을 살기 보다는 유전자 전달을 위한 도구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의미와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난건 수동적인 것이다, 결국 삶은 주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는 능동적이다. 나의 의지에 따라 충분히 의미있게, 즐겁게, 행복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이 의미있는게 아닐까.

그런데 당시 이 소설은 나에게 별로 감흥이 없었다.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없었고,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건지도 이해가 안됐었다.

당시 내가 좋아하던 작가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씨 이야기, 비둘기, 콘트라베이스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결이 많이 다르긴하다.

젊은이들의 사랑과 방황보다는 인간 내면의 탐구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아마 이전까지 해야하는걸 하기만 하던 생활에서 벗어나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가야되나에 대해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하던 때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하루키 소설과의 첫만남은 어려웠고, 이후 한동안 그의 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하루키의 에세이들 (특히, 여행집)을 읽고 그의 유머에 빠져들어, 한편으로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이 부러워 에세이들을 탐독했고, 이어서 단편집들을 그리고 장편소설로 넘어가면서 선택한 첫책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아마 길고 평범하지 않은 제목에 끌렸을지 모른다.

하드보일드라는 영어단어에 호기심이 생겼을 수도.

상실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초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이었는데, 책장을 열자마자 빠져들어 읽었다.

솔직히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한건 아닌것 같은데, 일각수가 사는 마을, 꿈을 읽는 사람, 그리고 꿈속으로 들어가는 설정이 생소했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된 탓에 이런일이 가능하냐란 의심할 새도 없이 그 상황에 몰입되어 버렸다.

이후 두어번 더 읽었고, 태엽감는 새, 해변의 카프카와 같은 유사한 스타일의 소설들을 읽어나가면서 소위 그의 덕후가 되었다.

그래서 신간이 나오면 궁금함에 팬심이 더해서 꼬박꼬박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리고 도시와 그 불확실한벽이 가장 최근에 읽은 그의 책인 것 같다. 최근엔 뜸해졌지만..누군가 나에게 하루키 작품 중 무엇을 가장 좋아하냐고 물으면 카테고리로는 에세이지만, 소설 중에서는 언제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였다.

그리고 영화 '인셉션'을 보는 내내 이 소설이 떠올라서 몹시 흥분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인셉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 책을 추천했었다.

서론이 매우 길어졌는데, 요는 노르웨이의 숲은 그닥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었을 때는 반가웠다. 이번에 읽게 된다면 세번째인데, '위대한 갯츠비'처럼 내가 세번의 시도 끝에 책의 진면목을 발견할지, 아니면 피천득의 인연처럼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하는 '아사코'가 될지 궁금했다.

시간이 없어서 휘리릭 훑어보기만 했는데, 그의 다른책에서 느꼈던 몰입은 없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 더 이해가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사람들과 토론을 하면서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짐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이 책의 메세지에 어느정도 공감하게 되었다.

지금 봐도 놀라운건 소설 한편에 무려 자살하는 사람이 3명이나 등장한다는 점. 도대체 1969년의 일본은 어땠길래 이렇게 젊은 청춘들이 허무를 느끼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했을까.

전후 급속한 경제발전 단계에서 여러 사회문제를 겪으면서 무력감을 느끼던 대학생들, 가치관의 혼란을 겪던 그들은 삶에 대해 의미를 찾기 위해 매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접했던 때는 그 시대적 배경과 차이가 있어서 그들에게 공감을 못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90년대 생들도 그 당시의 나와 비슷해보였다. 

그럼에도 방황하는 청춘들을 통해 하루키가 얘기하려 했던 건 공감한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래서 완전이란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걸 쫓을 때 불행해진다.

 

우리가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하거나 계획한다고 해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변수는 너무 많다. 특히나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외부요인들도.

그래서 불완전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불완전함에 대해서도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불완전함도 이해해야 한다.

또하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삶의 의미부여에 집착하면 안된다는 것.

리처드 도킨슨은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다음세대에 유전자기 위해 태어났다고 했다. 너무 극단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오히려 나는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 내가 모르는 의미가 있을거라고 찾으려고 한다거나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다가 그 무게에 압도당해 괴로운 삶을 살기 보다는 유전자 전달을 위한 도구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의미와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난건 수동적인 것이다, 결국 삶은 주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는 능동적이다. 나의 의지에 따라 충분히 의미있게, 즐겁게, 행복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이 의미있는게 아닐까.

 

세번째 만난 노르웨이의 숲. 세번보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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