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영화 '승부'를 보았다. 연기로는 깔게 없다는 이병헌이 나온다는 것, 이병헌만큼은 아니더라도 연기에 물이 오르는것 같았으나 그게 모두 약발이었구나 싶은 마약사건에 연루된 유아인이 출연하기에 영화에 대한 기대는 어느정도 있었다.
바둑은 잘 모르지만 이름은 들어봤던 조훈현9단과 그의 제자인 이창호9단의 실제 스토리라는 것도 흥미로웠고, 한편으로는 코로나와 유아인으로 인해 5년만에 개봉되는거라서 잘되었으면 하는 바램에 힘을 보태주고 싶었다. 이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다행히 1990년대 전후를 다루다보니 5년 늦은 개봉이 영화를 보는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현대물이었으면 배우들의 옷차림, 화장이나 대화에서 사용하는 단어만으로도 미묘한 어색함을 느낄 수 있었을텐데, 아예 3,40년전을 다루는데 불행 중 다행이었다.
초등생 꼬마를 직접 서울로 데려와 먹이고 재우고 자신의 성공 비결을 모두 전수하며 키운 제자, 그리고 재능은 뛰어나지만 아직은 좀 더 배워야한다고 생각했던 제자에게 어느날 갑자기 패하면서 겪게 되는 고뇌와 주변의 시선이 어땠을지, 그가 느끼는 좌절감과 수치심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도 어렵다.
한번도 아니고 내리 지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타이틀을 모조리 내줘야했던 스승.
스승과 다른 자신만의 바둑을 밀고 나가 결국 스승을 이겼으나 좋아하지도 못하고 죄송하고 불편한 제자.
이젠 내가 선배의 입장이 되다보니 이창호9단보다는 조훈현9단에게 더 마음이 갔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멋지게 패배를 인정하며 이제 너의 시대가 왔노라고, 더이상 배울게 없다고 쿨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현실에서 있을까?
멋지게 축하하고 싶지만 그렇게 안되고 자신감을 잃고 대국마저 피하게 되는 조훈현9단의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승부의 세계에서는 오직 승부만 생각해야한다는 말을 제자에게 전하고, 그뜻을 이해한 제자가 멋있었다.
실제 그들의 스토리를 모르고 있었는데, 이창호9단에게 패배한 이후 방황의 시간을 겪던 조훈현9단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승리해나가고 결국 제자와 다시 맞붙은 최종 경기에서 2:2의 팽팽한 승부 끝에 결국 마지막 대국을 승리하여 타이틀을 다시 찾는 모습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그가 이겼다는 것보다 그게 진정한 삶에 대한 자세라고 생각했고, 그걸 직접 보여준 사람이 있다는데 감동을 받았다.
조훈현9단이야말로 요즘 많이 대두되는 회복탄력성이 우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의 상황을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만약 그의 입장이었다면 어떘을까? 바둑을 놓지 않았을까..? 아니면 현역 은퇴를 하거나.
나에게는 이창호9단보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재기에 성공한 조훈현9단이 훨씬 멋있고 존경스럽고 부럽다.
이창호9단은 천재적인 재능이 더 큰 사람이지만 조훈현9단은 재능은 이창호9단보다 부족할 수 있어도 시련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고 배워서 더 끊임없이 실력을 쌓았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 이런거다. 비록 상황이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즐겁게 하면서 나의 역량의 폭을 확대해나가고 싶기 떄문이다.
영화는 드라마틱한 설정이나 과장없이 담담하게 흘러갔고, 그래서 더 주인공들의 감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주연배우는 정말 날라다녔다. 유아인을 보면서 재능과 노력 못지않게 자기관리가 더 중요함을 다시금 꺠닫게 된다
지금 크고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주저앉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툭툭 털고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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