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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남들도 다 그렇구나...

뼛속까지 내향형인 나는 이런 성향을 갖고 직장생활을 20년 넘게 해왔다는것에 대해 놀랍기도 하고 가끔은 기특하게 생각한다.

사실 대부분의 시간은 그런 성향을 가진 스스로를 미워하고 자책했다. 나의 성향이 엄마에게서 온건지 아빠에게서 온건지 따져가면서 원망할 대상을 찾기도 했고 (슬프게도 두분다 외향적인 성향이 아니다)

 

초등학교 처음 입학하던 때의 고역을 아직도 기억한다. 운동장 한가득히 모인 낯선 아이들, 처음보는 선생님. 그 시절 기억나는 장면 중 하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아침에 학교를 안가겠다고 골목 어귀에서 머뭇거리를 나를 어르고 달래다가 급기야 등을 떠밀던 엄마의 모습, 학교에서 내내 화장실을 안가고 참다가 결국 모든 수업이 끝나고 돌아와 집 대문앞에서 오줌을 싸고 대성통곡하는 모습..그런 것들이다.

학년이 바뀌거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진학할때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사귀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다행히 왕따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절친을 만드는 성격도 아니어서 늘 외로움과 어색함이 함께했다.

 

이런 성격이 학교를 떠나도 달라질리 없다. 직장을 다닐때도 이후 대학원을 다닐때도 비슷했다.

일처럼 해야하는 것을 하는 상황에서는 성향과 상관없이 낯선 사람과도 잘 이야기하고 콜드콜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업무 미팅은 누구와 하더라도 문제없이 하지만 그를 벗어난 개인적인 대화를 하거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여전히 어렵다. 그나마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오는 사람들은 나의 이런 성향을 이해하고 끊임없이 연락을 하고 찾아준 사람들이다.

인사는 잘 하지만 관심을 표현하는 멘트를 날리는 거는 어색하다.  업무가 끝난 후 사람들과 회포를 푸는건 좋지만 그렇다고 내가 분위기를 주도하며 사람들을 즐겁게 하거나 센스있는 리액션을 하는 것도 잘 못한다.

그래서 회식자리에서 좌중을 압도하며 유머와 재치있는 멘트로 리드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움과 함께 존경심마저 든다.

그러다보니 스스로를 사회성이 없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점점 그런 자리를 멀리하게 된 것 같다.

물론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것들이 상당히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특히 직급이 올라갈 수록 더.

그래서 나름 고쳐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나의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런 나의 성격은 공채문화가 자리잡은 대기업에서, 경력입사자로 살아가는데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다행히 일이 좋아서 그리고 직장에 다니는 것 외에 뾰족한 경제적 수단의 대안이 없기에 오로지 일만 바라보고 버텨왔다.  일이라도 잘 해야 인정을 받기 때문에 업무 시간 외에도 일과 관련된 생각을 하고 관련 자기계발을 위해 돈과 시간을 많이 투자해왔다. 

내 기준을 보면 보통 사람들보다는 1.5배 이상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던것 같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버텨오긴 했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엊그제 회의 시간. 늘 부사장님에게 아부성 멘트를 밉지 않게 날리는 팀장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업무보고든 회식자리든 유려한 말솜씨와 뻔뻔하고 센스있는 말투가 경쟁력이 분이었는데, 보고서에 빡빡하게 적어놓은 메모를 보았다.

간단한 보고는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술술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나름 꼼꼼히 메모하고 준비를 하는구나 싶었다. (연습을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회의 중간에 놓지지 않고 아부성 멘트를 날리는 순간, 그분의 떨리는 손가락을 보았다.

업무와 관련된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일상적인 대화를 과정에서 의견을 얘기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방황하는 손가락과 미세한 떨림을 보니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어쩌면 저분도 나처럼 내향적인 성격이었는데, 직장생활을 하느라 그런 사람인척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깨달음.

어쩌면 나는 중간에 포기했던걸 더 노력해서 남들이 그런 사람인척 믿게 완벽하게 연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지난주 종영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빠져들게 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 가족의 막내인 배우 김지원이 맡은 염미정의 대사였다.

'지쳤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물론 모든 관계를 노동으로 느끼지는 않지만 나의 마음을 너무 잘 대변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회에서 염미정은 변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만큼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구씨에게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 하나하나 쳐부수지 말고 환하게 웃으며 환대하라고 말해주며 구씨를 해방의 길로 이끈다.

그리고 그녀 또한 항상 스스로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녀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자신은 사랑으로 가득채워져있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염미정처럼 내 옆에 앉았던 부장님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되 포기하지 않고 필요한 걸 해내는,  그게 꼭 멋지진 않더라도 그 자체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

극 중 대사처럼 3초 7초 모아서 24시간 중 숨 쉴 수 있는 5분을 만들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거 그걸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쁘고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게 인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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