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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가볍게 시작했다가 비장하게 끝난 나의 한라산 등반기

예상 못한 에피소드가 가득한 지난 주말 한라산 등반.

관음사 코스로 시작해 백록담을 거쳐 성판악 코스로 내려오는 것만 정했을 뿐

백록담을 보고 오겠다는 각오도, 동행한 친구처럼 버킷리스트도 없었다.

 

6월경 '한라산 갈래?' 라는 메세지에 '그래! '라고 대답한게 전부.

항공권 예약하고 잊고 지내다 10월초쯤부터 등산화로 시작해 배낭, 등산스틱, 장갑..등 거의 갖고 있지 않은 등산용품을 하나씩 구매해나가고 출발이 임박해서는 친구가 보내주는 긴 리스트에서 빠진 것들을 준비해나갔다.

배낭에 거는 미니파우치, 무릎보호대, 맨소래담 로션까지...이제 남은 건 후레쉬 뿐.

짐이 될까 싶어 살까말까 고민하는 중에 PT선생님이 빌려주겠다고 해서 사지 않았는데, 깜박하고 받아오지 않아서 그것만 챙기지 못했다.

이제까지 몇번 안된 등산에서 정상을 찍고 오겠다는 각오로 간적은 한번도 없었고, 정상까지 못가서 아쉬웠던 적도 없었다.

대학시절 딱 한번 친구손에 이끌려 막판 거의 기어가다시피 관악산에 올랐던게 정상을 찍은 걸로는 유일했다.

그래서 굳이 백록담까지 가겠다는 목표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했지만, 딱 하나 걸리는건 17일에 맞은 독감주사와 그 이후 업무 면담 및 부서행사, 개인적인 약속의 연속으로 무리한 탓인지 21부터 본격적인 감기증상이 나타났다는 것..

제주일정을 취소하기에는 너무 임박해서 감기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23,24,26일 일주일동안 세번이나 병원에 방문하고 증상에 따라 약을 조절했음에도 하필 이럴 때 일이 몰리는지라 감기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10/27

꼬박 약을 챙겨먹었고 전날 짬을 내 수액까지 맞았지만 감기 증상을 계속 되었고 오후 반차를 내고 짐을 챙겨 공항에 가는 중에도 열이 올라 몸에서 식은땀이 계속 났다.

조금이라도 에너지를 챙기고자 일부러 2시간전 집을 나섰다. (인터넷에서 확인한 지하철 이동시간은 약 50분) 

등산화부터 각종 등산용품이 담긴 캐리어를 조심해서 끌고, 가능하면 엘리베이터를 타며 여유있게 지하철로 이동,

아직 퇴근시간 전임에도 9호선 김포공항행 지하철이 그리 붐비는 지 처음 알았다.

다행히 여유있게 출발한 탓에 2대를 보내고서야 지하철을 타고 트렁크이 기대어 한참 서서 가다가 앉자마자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공항 도착 

친구도 비슷하게 도착해서 서로 얼마나 힘들게 왔는지 이야기하며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준비성 있는 친구덕에 일사천리로 호텔까지 이동, 짐을 풀고 등산에 필요한 소소한 장을 보러 근처 이마트로 이동, 필요한 것들과 간단한 저녁거리를 빠르게 구매하고 호텔로 복귀. 호텔 1층에 있는 스타벅스 들러 제주 한정 음료인 말차&망고 블랜디드를 마시며 제주에 온 것을 기념했다.

 

10/28, 약 12시간 20분 (06:43 ~  07:00)의 한라산 등반

아침 5시30분 알람을 듣고 일어나 씻고, 간단하게 과일과 요거트, 전날 스벅에서 구매한 에그 샌드위치를 나눠먹고 짐을 챙겨 예약한 택시를 타고 관음사로 향했다.

도착한 시간은 6시40여분. 아직 어두웠지만 사람들이 꽤 있었다(5시30분부터 등산 가능).

옷매무새와 배낭을 잘 여미고 등반 시작.

어두워서 친구가 가져온 후레쉬에 의지해 조금 걷다보니 해가 떴다.

동네 우면산이 시작부터 긴 계단으로 시작하는데,그것에 좀 단련되었는지 완만하게 시작하는 코스가 어렵지는 않았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나무를 쪼아대는 딱따구리도 구경하며 여유있게 걸어갔다.

사람들의 흐름을 타고 30분쯤 걷다가 잠깐 쉬며 PT선생님이 챙겨준 포도당 캔디와 물 한모금 마셨다.

친구가 숨이 차서 힘들다며 본인의 페이스대로 쉬면서 갈테니 나보고 먼저 가라고 했다.

그렇게 먼저 걷다가 친구가 안보일 때쯤 기다렸다가 다시 가고를 반복하다보니 중간중간 주변을 둘러볼 시간이 있어 좋았다. 1시간쯤 갔을 때 관음사지구 야영장에서 챙겨간 사과와 귤을 먹으며 쉬고 이어 삼각봉 대피소를 거쳐가며 겨울과 가을과 잠깐의 여름을 느낄 수 있었다.

산 초입에는 단풍이 예쁘게 물들어 있었는데, 중반 이후부터는 이미 단풍이 진 모습이었다.

 

정상에 다다를수록 국내 여느 산들과 다른 느낌이었다. 나무는 적고 이끼?같은 것들로 뒤덮인 모습.

몇해전 겨울에 방문했던 오키나와의 잔파곶이 떠오르기도 했다.

힘들게 다다른 백록담, 이미 사람들로 붐비었고, 표지석에는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기대에 부풀어 바라본 백록담은 안타깝게도 물이 모두 말라버려 흙바닥을 드러냈지만 그 또한 절경이었다.

30분 정도 싸온 음식을 먹고 쉬며 경치를 감상하다가, 2시전에 하산을 시작해야한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성판악 코스로 다시 이동하기 시작

왕복 1시간의 우면산 소망탑 코스를 생각하면 하산은 어렵지 않을꺼라 생각했는데, 

이미 7시간의 산행 탓인지 다리가 아픈데다가 성판악 하산 코스 초반 돌길이 생각보다 어려워서 다리에 힘이 바짝 들어간 탓에 초반부터 힘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해지기 전에 하산을 마무리해야한다는 생각에 거의 쉬지 않고 걷다보니 내다리가 아닌 듯한 기분.

우리가 하산객중 가장 마지막이라 사람들도 거의 안보여서 이상한 공포심이 생기고 또 풀숲에서 소리가 나면 야생동물인가 싶어 겁이 났다.

그러다 부스럭 소리가 너무 가까이 들려 잠시 멈추고 소리나를 곳을 바라보니 회색빛 사슴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TV에서 보던 황갈색이 아니고 윤이 나는 회색에 양쪽 뿔도 그림처럼 붙어있어서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다시 고개 들기를 기다렸다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시간에 쫓겨 발길을 돌려야했다.

진달래밭대피소, 속밭대피소에서도 화장실만 다녀오고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지만 속밭대피소를 조금 지나자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 휘엉청 보름달임에도 사방은 금방 어두워졌다.  (진달래밭, 속밭 대피소 중간에 있는 사라오름은 아쉽게도 패스)

이렇게 깜깜할 때 산속에 있었던게 처음이라 무섭고 여기서 다치면 어떻게야하나 여러생각이 들었는데, 다행히 우리처럼 늦은 가족을 만나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아빠, 엄마, 중학생쯤 보이는 아들이었는데 엄마가 힘들어 계속 뒤쳐지고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운지라 재촉할만도한데 다정하게 아내를 챙기며 힘들면 쉬어가자며 안심을 시키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due date을 지키기 위해 나와 동료들을 재촉하던 모습이 오버랩되며 잠시 반성모드.

내가 앞서가던 때와 달리 후레쉬가 하나 뿐이라 친구와 나란히 걸었다. 조심하라고 당부하며, 조금만 더 힘내자고 격려하며 1시간여쯤 걷다보니 입구 도착

이미 다리의 감각은 없어지고 춥기도 해서 시간을 확인할 정신이 없었는데, 친구가 7시라고 했다.

장장 12시간 20분.

서둘러 등반 인증서를 받고, 택시를 불러 단백질 보충을 위해 고깃집으로 향했다.

친구가 기존 방문했던 그 식당은 고깃집임에도 토마토 스프가 있었는데, 추운 몸을 달래기에 딱 좋았다.

식당 사장님의 조언에 따라 호텔로 가는 길에 사우나에 들러 30분 정도 몸을 풀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친구는 침대에서 쓰러져 잠들었다.

 

12/29

사우나 덕인지 다리가 많이 풀려있었다.

정상에서 먹으려고 싸갔다 먹지 못하고 가져온 사발면과 사과, 요거트로 아침을 먹고 서둘러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

1층 스벅에서 산 커피를 텀블러에 담고 택시타고 공항으로 이동

완벽할 것 같던 귀경길은 항공사 수속데스크에 늘어선 긴 줄을 보자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다행히 중간에 탑승시간 임박 고객들을 별도 데스크에서 체크인 해줘서 안전하게 탑승. 마지막에 수속한 덕인지 한번도 타보지 못한 맨 앞좌석에 앉게 되어 아주 편하게 올 수 있었다.

공항에서 친구와 헤어져, 올때처럼 지하철을 타고 귀가, 12시 20분 쯤으로 기억

 

집에서 나갔다 귀가한 시간 약 45시간, 제주도에 머문 시간으로 따지면 37시간 30분. 

이중 한라산에서 12시간 20분을 머물렀다.

아침에 풀렸나 싶던 다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해서 저녁에는 폼롤러로 다리를 푸는데도 너무 아팠다.

게다가 등산할 때 거의 증상이 없어 나았나 싶었던 감기도 집에 돌아오면서부터 다시 증상이 심해지며 콧물과 기침, 편도선 통증과 열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이 상태로 12시간을 등산한게 새삼 대단하다 싶은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해야하는건 어떻게든 하는 미련함이라할지 끈기라할지..그런 면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순간.

 

꼭 백록담까지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친구가 너무 힘들어해서 못가겠다고 하면 별 아쉬움없이 중간에 내려왔을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자신의 버킷리스트라 어떻게든 가겠다는 마음이 있었고 잘 버텨준 덕에 나도 백록담을 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 재밌는 에피소드도 있고, 시작과 끝이 모두 깜깜했던 등산은 처음인지라 평생 기억에 남을 듯하다.

 

12/30

역시나 밤새 기침이 나고 편도선 통증으로 인해 잠을 설쳤다.

그리고 다리는 마치 갓 하산했을 때처럼 통증이 있어 걸을 때 어기적거리게 된다.

그럼에도 평소와 똑같이 출근하고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엄두를 못내고 겁내하던 많은 것들이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닌...은 아니지만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을 수 있겠다는 (솔직히 말하면 고통스럽지만 견딜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챙기고 조심하는 건 좋지만 너무 몸을 사리며 경험을 제한할 필요는 없겠다는 깨달음.

그리고 등산하는 동안 두어번은 친구만 정상속도로 걸었다면 12시간이 아니라 8~9시간 만에 끝낼수도 있겠다는 생각했는데, 그렇게 자주 쉬고 힘들어했던 친구가 스스로를 대견해하는 걸 보면서 내가 스스로에 대한 칭찬에 너무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래서 남에 대한 칭찬도 인색하다.)

내가 계속 앞서 나가고 이끌어준 덕에 완주했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감기에 걸린 상태로 12시간 넘게 산행한 나를 칭찬해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항상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잘한점보다는 아쉬운 점만 생각했던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열심이 운동하고 좋은 음식 먹으면서 관리해서 더 많은 경험들을 해봐야겠다.

몸을 사리기엔 아직 젊다. 

 

참. 이번 산행을 통해 다시한번 느낀 점

정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정말 짧다. 그러니 과정을 즐기지 않으면 허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정상에서 내려올때는 생각보다 고통스럽다. 그런데 동반자가 있다면 한결 힘이나고 위로가 된다. 

우리 인생과 너무나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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