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어 접하게 된 책. 한승태 작가의 '어떤 동사의 멸종'.
언어와 관련된 책인가 싶었는데, 직업에 대한 이야기다. 나같은 오해를 방지하고자 '사라지는 직업들의 비망록'이라고 부제를 친절하게 달아놨다.
AI 등 기술 발전으로 향후 사라질것으로 예견되는 직업 중, 인간이 하기에는 힘들고 불편한 4개의 직업을 작가가 몇달간 직접 일하며 경험한 얘기를 담았다. 바로 체헐리즘이 떠올랐는데, 각각 기사와 소설이라는 글을 쓰기 위해 직업을 체험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체헐리즘 보다는 직업의 체험기간이 길고 해당 직업도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다는 점이 차일고 하겠다.
작가는 콜센터상담, 물류센터 하역/상차, 뷔페식당 요리, 빌딩 청소라는 직업을 각각 전화받다, 운반하다, 요리하다, 청소하다 4개의 동사로 표현한다.
업무나 일상에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접해서 어느정도 그 일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직업에 대해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에서 콜센터와 업무 협의를 할때, 또는 개인적으로 콜센터와 통화할 때 그들이 다소 방어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이 해결해줄 수 있는게 별로 없어서 답답했던 적이 많았은데, 이 책을 통해서 왜 그럴수 밖에 없는지 알게 되어 앞으로 그들을 상대할 때 조금은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적어도 귀찮아서 그런거라는 오해는 안할 수 있으니)
그리고 혹시 협업을 하게 되면 그들에게 곤란한 일을 떠넘기게 되지 않도록 프로세스를 세심하게 검토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작가는 체험한 4개 직업 중 콜센터가 가장 어려웠다고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화장실도 제때 못가고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앉아 있어야 해서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최근 AI가 콜센터를 빠르게 대체하면서 직업을 잃게된 상담원들의 시위를 보여준다. 아무리 힘들어도 누군가에게는 뺐기고 싶지 않은 직업임을, 효율성이라는 단어로 쉽게 대체하기에는 생각해야할 것들이 많음을 상기시켜준다.
물류센터 역시, 야간 작업을 하면서 온몸이 땀으로 다 젖을 정도로 극한까지 몰아치는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지만, 일을 끝내고 아침 공기를 마시며 느끼는 성취감을 보여주며 노동이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게 만든다.
요리하다 챕터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음식이 버려진다는 사실, 식당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일이 더 많고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앞으로 뷔페식당에는 왠만하면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고.
청소하다를 읽으면서는 사무실 계단이나 화장실에서 자주 접하는 여사님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저자가 직접 체험하다보니 마치 내가 그 일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몰입이 잘되고 저자에게 공감하게 된다.
힘들고 어렵고 불편하지만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 않게 위트있게 풀어내어 읽는 동안 많이 힘들지 않았다.
또한 직업은 다르지만 누구나 공감할만한 일의 어려움, 동료/상사와의 관계들도 생생하게 묘사해서,
어떤 일을 하느냐를 떠나서 직업인으로서 누구나 쉽게 공감하게 만든다.
그래서 보통 틈날때 조금씩 읽는 편인데, 이 책은 일찍 퇴근한 어느날 4시간 동안 쉬지않고 읽을 수 있었다.
가볍게 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AI와 로봇이 대체할 가능성이 높은 4개의 직업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선택으로 얻게 된 직업일 수도 있다는 점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는 저자가 경험한 4개 직업에 국한된게 아니다. 챗GPT의 등장으로 대체되기 가장 쉬운 직업으로 화이트칼라와 전문직이 지목되는 지금, 과연 나의 일은 안전한지, 출근보다는 퇴근을 훨씬 더 좋아하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 직업은 어떤 의미인지 고민을 던진다.
나 역시 오랫동안 일을 했지만 즐거웠던 적은 가끔이고 대부분은 힘들고 어렵다. 그럼에도 힘들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원하는 것을 이뤄냈을 때의 감정은 비록 짧지만 강렬하다. 만약 다음달부터 AI가 내 업무를 대체한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다.
언론에서 그렇게 많이 얘기했음에도 남의 얘기처럼 흘려들었기 때문이리라.
이제는 정말 진지하게 그 상황을 고려해볼 때다. 일은 우리에게 경제적 수단일 뿐 아니라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삶의 의미에 있어서도 아주 큰 영역을 차지한다. 우리가 그 일을 놓을 때 나는 과연 누구로 정의하고 살아갈지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고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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