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과 함께 시작한 연휴, 기다리던 영화 봉준호 감독의 미키17을 봤다.
평소와 달리 홍보차 출연한 각종 유튜브 콘텐츠를 보면서 예습을 했다.
극장은 약 5년만의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환영하듯 미키17이 대부분의 상영관을 점유하고 있어 다행히 예매는 어렵지 않았고, 선호하는 좌석에 앉아 기분좋게 관람할 수 있었다.
유쾌한 영화를 좋아한다는 감독의 말처럼 극한의 상황에 처한 미키의 상황을 무겁지 않게 풀어냈고 중간중간 웃기도 했지만 이후 여운은 길게 남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지난달 읽은 김기태 작가의 '두사람의 인터내셔널'에 수록된 단편 '무겁고 높은'의 주인공 '송희'가 떠올랐다.
미키17에서 주인공 미키의 상황은 SF영화답게 죽은 이후에 기억과 성향은 유지된채 끊임없이 휴먼 프린트된다.
그래서 위험하거나 힘들거나 꺼려지는 일들을 도맡아 한다. 소위 목숨을 내놓고 한다.
어차피 죽으면 다시 프린트 된다는 걸 알기에 미키는 담담하게 그 상황을 그리고 결국 맞이하는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미키는 죽을 때의 기분을 뭍는 동료에게 두렵다고 고백한다.)
미키가 우주선을 수리하기 위해 우주선 밖으로 나갔다가 사실은 수리가 아니라 방사능에 노출되었을 때의 증상을 알기 위한 실험 대상임을 알게 되고 보호 장갑을 벗으라는 지시에 따라 장갑을 벗다가 우주 쓰레기에 의해 손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볼 때, 몇년 전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혼자 수리하다가 목숨을 잃은 청년이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그는 미키처럼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닭뼈와 쓰레기로 다시 프린트되지도 못한다.
영화 속 미키는 우리가 훨씬 더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군가는 지금도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인간으로서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위험하거나 꺼려하는 일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은 그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경험이 있거나 그럴 수 있다.
자칫 부족하고 찌질해 보이는 미키지만 어마무시한 사채업자를 피하기 위해 나름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토미처럼 잔머리를 굴려 남을 팔아 자신의 안위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맛없는 음식을 먹고 이상한 실험과 노동에 시달리며 목숨을 잃으면서도 삶이 덧없다 허무해하거나 푸념하는 대신 사랑을 하며 순간에 최선을 다한다.
송희 역시 그렇다. 역도는 혼자하는 스포츠다. 그리고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기교나 운이 따르기 어려운 종목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근력을 키워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오롯이 혼자서.
잠깐이라도 내 실력을 다른 사람을 통해 숨길 수 없다.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무섭고 슬플까..감히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넘쳐나는 자기계발 유튜브에서는 안되는 일은 없다고 얘기한다. 할 수 있다는 자기암시와 꾸준한 노력이 우주의 에너지를 끌어와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얼마든지 현실화될 수 있다고.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송희의 선택이 더 어렵고 용기가 필요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순수하게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고 그 후 내던지는 행위가 결합된 역도라는 운동을 좋아해서 그를 위해 묵묵히 훈련했지만 그가 가진 재능이 충분하지 않다는 걸 깨닫았을 때 좌절보다는 미련없이 보내주는 선택한다.
부족한 재능이나 서포트해줄 수 없는 가정형편을 탓하지 않고 한 때 뜨겁게 사랑했던 역도와 마침표를 찍는다.
누군가는 안타깝고 측은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이 있기에 송희는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
새로운 기회와 인생이 열린 것이다.
미키와 송희. 누군가의 잣대로 보기엔 어딘가 부족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삶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누구보다 성숙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에겐 그들이 평범하지만 비범하다.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토록 낭만적인 과학책이라니... ; 코스모스 (by 칼 세이건) (0) | 2025.03.29 |
---|---|
위대한 변화는 사소한 행동에서 시작한다 ; 이처럼 사소한 것들 (0) | 2025.03.24 |
빛이 이끄는 곳으로 ; 건축가가 지어낸 집에 관한 이야기 (0) | 2025.02.25 |
어떤 동사의 멸종 (3) | 2025.01.22 |
숨결이 바람될 때 ; 의식하지 못할 뿐 죽음은 그림자처럼 항상 삶의 옆에 있다 (3) | 2024.12.29 |